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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업무에 지쳐 정신적으로 스트레스를 받는 기간이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야근에 주말까지 쉽없이 출근했다. 돌이켜 보면, 나를 이루고 있던 무언가를 잊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좋아했던 취미들, 운동-음악-독서를 근 몇 개월 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를 이루는 기둥들이 얇아지고 무너지기 시작하며, 나의 정체성도 함께 무너졌던 것 같다. 이러한 상황에 오래 있어서 그랬던 걸까, 내가 처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다 정말 우연히, 주말 아침에 집 주변에 있던 독립 서점을 가보게 되었다. 친절하게 맞이해주시는 주인장과 따뜻한 핫초코가 마음을 녹여줬다. 그렇게 내가 좋아하는 독서를 오랜만에 하니, 글이 술술 읽혔고 마음 한 켠도 함께 따뜻해졌다.

대전광역시 갈마동에 위치한 독립서점 "삼요소"

독립 서점을 자주 들리게 된 계기는 그러한 따뜻함 때문이었던 것 같다. 조금 더 크고, 조용한 독립 서점을 찾다 보니 재밌는 공간을 발견했다. 무인으로 운영되는 독립서점인데, 가끔 독립 영화의 시사회를 열기도 하는 그런 매니아들의 집합소로 느껴졌다. 주인장의 책장에 있는 책은 무료로 읽을 수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내 눈에 띄었던 책이 한 권 있었다. 바로 세르주 라투슈의 “낭비 사회를 넘어서”라는 책이다.

세르주 라투슈, 낭비 사회를 넘어서

세르주 라투슈는 나이가 지긋한 프랑스의 철학자로, political sciene, philosophy, economy의 여러 학위를 갖고 있는 파리 제 11 대학의 명예 교수다. 과거부터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분석해 왔으며, 오늘날 아주 유명한 “탈성장”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낭비 사회를 넘어서”라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지니는 무한 성장의 역설을 비판한다. 해당 책을 읽고 기억에 남는 몇가지 글귀를 적어보았다:


  1. 실업의 위협 속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공장에서 대형 마켓으로, 대형 마켓에서 공장으로 이동하면서 임금을 상품으로, 상품을 임금으로 교환하는 물질대사를 수행하는 바이오다이제스터의 활동으로 축소되어 버렸다.”
  2. 상상력의 로보토미(lobotomy), 상상력의 식민화
  3. “상품 공급이 오늘날의 계율이라는 사실을 인정한 이상, 구매력이 없는 이들이 공급된 상품을 > 구매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는 그런 행동이 계율을 어기는 것, 즉 상품을 획득하지 않는 것보다 옳은 일이기 때문이다. … 우리는 결국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손에 넣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하게 되는 것이다.”
  4. 네오필리아
  5. 생산이 계속되려면 제품들이 죽어야 한다.
  6. 에코는 단지 화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철학적 결론에 도달한다. “당신의 도덕이 우리에게 스파르타인이 될 것을 요구했다면, 오늘날은 시바리스인이 되라고 한다.”
  7. ‘진보적’이라는 수식어는 금세 잊혀졌지만 그 말이 지시하는 관행은 확산되었다. 각 기업들의 비즈니스 전략은 갈수록 스타일의 진부화에 초점을 맞춰 구상되었다. … 불황이 닥치자 이런 움직임이 가속화되었다. 이제 엔지니어 대신 디자이너들이 미국 산업계를 이끌어 가기 시작했다.

자본주의 한계에 대한 분석은 너무나도 다양한 학자들이 해왔다. 마르크스의 “자본론”, 쟝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등은 ‘가치’의 의미에 집중하여 자본주의가 갖는 거시적-구조적 문제점과, 이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미시적-개인적 문제점을 지적했다. 해당 책도 비슷한 맥락에서 소비 행위와 제품이 갖는 문제점을 주제로 다루었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계속해서 성장해야 한다. 일례로, 주변에 위치한 인근 연구소에서는 과제가 실패하자 과제의 책임자였던 팀장님께서 (총대매고) 사직서를 냈다고 한다. 과제를 성공시키고 좋은 사업을 통해 장기적으로 영업 이익을 불러와야지 자신의 팀원과 조직에게 월급을 줄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속적으로 매출을 일으키지 않으면, 안정적으로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없게 되고, 월급을 받지 못하거나 짤리게 된 직원들은 구매력이 줄어들어 사회의 소비가 줄어들게 된다. 소비가 줄어들면 생산이 줄어들 수 밖에 없고 이는 매출의 감소를 또다시 야기하게 되기 때문에,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영리조직을 하나의 굴러가는 바퀴로 비유한 것은 매우 그럴 듯하다. 조금이라도 속도가 줄어들면 사회는 경직되고 경제가 악화된다. 반대로, 속도가 늘면 사회는 유연해지고 경제가 활성화된다.

문제는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항상 우리 사회의 발전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2010년 발표된 다큐멘터리 영화인 “The Light Bult Conspiracy”를 보면, 전구 기술의 발전은 이미 충분히 일어났으나, 지속적인 매출을 위해 전구의 수명을 의도적으로 줄여 판매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의도적 진부화”는 전구뿐만 아니라, 스타킹, 자동차, 아이폰의 경우에서도 이미 발견된다. 더 나아가, IT 서비스 기업들은 구독(Subscription) 시스템을 도입한다. 내가 좋아하는 디제잉 관련 HW/SW 기업인 Pioneer도 구독 시스템으로 전환한 이후, SW의 업데이트를 진행해 의도적으로 HW를 사용할 수 없게 만들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려고 하는 나에게, 7번의 글귀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더 뛰어난 과학 기술이 발전되더라도, 더 이상 그것이 오로지 공급될 수 없다. 과학과 기술은 자본주의에 있어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학술적 가치가 아닌 제품의 가치, 자본주의적 가치로 평가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소비력에 따라 사람들에게는 소비할 수 있는 제품의 양질이 구분된다. 사실 이는 어찌보면 옛날부터 그래왔던 걸 수도 있겠다. 돈이 되지 않는 연구에는 적은 연구비가 펀딩되는 것처럼 말이다.


자본주의가 많은 한계점을 지닌다고 해서 사회주의와 같은 다른 시스템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무리한 주장을 펼칠 필요는 없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성장하며, 예상치 못한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적절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주면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자본주의는 “성장의 계속성”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무한성은 물리적으로 한계를 가질 수 밖에 없지 않을까? 만약 성장이 무한히 계속된다면, 언젠가 특이점에 이르게 되지 않을까? 이러한 생각은 이미 레이 커즈와일 같은 미래학자들이 주장한 것과 같다. 무한히 성장할 수 없다면, 결국 사회경제 시스템의 붕괴가 수반될 것이다. 어떠한 방향이든 디스토피아적인 결과를 불러온다.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성장의 계속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일론 머스크가 추구하는 화성으로의 이주가 필수 불가결한 해결책일지도 모른다. 관련된 서적을 조금 더 찾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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